과분한 관심을 받은 글의 A/S - 중앙일보 칼럼에 대하여...서프라이즈 펌...
제가 쓴 글에 대한 많은 분의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 보러 가기 → 기자실 폐쇄가 알 권리 침해? 솔직해집시다. )
A/S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오늘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 관련 뉴스들을 쭉 훑어보았습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네요. 정부 부처의 기자실 폐쇄와 통합 브리핑 룸으로의 전환에 대한 얘기는 좀 줄어들었습니다. 방안이 나오기 전후로 관련 기사는 물론 사설로도 도배하던 것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변화지요. 이 아이템의 ‘약발’이 떨어져서, 국민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게다가 국정 브리핑에서도 언론의 융단폭격에 대해 거침없이, 종합적으로 반박을 하고 있군요.
그래서 저는 오늘 아주 재미있는 기사 한 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중앙일보 경찰 기자가 쓴 칼럼(도 아니고 해설 기사도 아니고...^^)☜인데요. 언론이 여론을 어떻게 호도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중앙일보 문제의 칼럼
핵심적인 부분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화 김승연 회장 폭행 관련 수사 취재 과정의 내용 전략)...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다.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한다."는 노 대통령의 판단과 인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입사 5년차의 신참 기자다. 짧은 기자 생활이지만 기자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기자를 본 기억이 없다. 다들 뭔가를 하느라 바쁘다. 기사를 쓰든지, 전화 취재를 하든지, 아니면 케이스 취재라도 한다.
22일 정부가 발표한 기자실 통폐합 방침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기자의 취재 현실을 이렇게도 모를 수 있나."...(후략)』
박근혜식으로 표현하면 "왜 하필 입사 5년차의 경찰 (담당) 기자일까요?"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보건복지부 출입 기자들(을 포함해서 정부 부처 출입 기자들)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을 반박하는 칼럼은 보건 복지부 담당 기자가 쓰는 것이 정상일 터, 왜 경찰 기자가 썼을까요?
2. 경찰 (담당) 기자
일반적으로 기자가 공채를 통해 입사하면 가장 먼저 경찰 기자(=일본어로 사쓰마와리(察回인 모양입니다.))로 시작합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일본 강점기 때의 잔재로 보아 무방하죠. 경찰 담당 기자는 보통 3~4개 경찰서(이 중 한 곳에 기자실이 있습니다.)와 서울 동서남북 지검, 대학, 병원, 시민단체, 공항 등을 주 취재원으로 합니다. 칼럼을 쓴 기자가 남대문 경찰서를 담당하는 기자라면 기자실은 중부 경찰서에 있겠네요.
경찰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초인적인 체력입니다. 담당하는 곳은 많은데, 쓸 만한 ‘보도자료’를 제공해 주는 데는 거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담당 구역을 돌아다니며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는 ‘마와리’가 필수입니다. 김승연 회장 폭행 사건 같은 게 생기면 ‘하리꼬미’(일본어인데, 한자어는 모르겠습니다.)를 합니다. 하리꼬미는 계속 한 자리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건 현장에서 하염없이 대기하면서 사건 관련자로부터 한 마디라도 직접 언급을 더 듣기 위해, 한 가지라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싸우는 겁니다.
경찰 담당 기자가 이렇게 현장을 뛰어다녀야 하는 이유는 현장에 없으면 ‘보도자료’를 주는 데가 없으니 기사거리를 건질 수 없고, 기사거리를 못 건지면 기사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치고 앉아 있을” 시간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죠.
3. 정부 부처 담당 기자
반면에 연차가 좀 되어서 정부 부처를 담당하는 기자들은 가장 중요한 취재 대상이 정부의 정책입니다.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듣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통령께서 “담합한다.”고 표현하신 것은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대체로 브리핑이 끝나면 기자들이 쓰는 기사의 방향(=야마)은 비슷해집니다. 연합뉴스 기사 제목이 참고되고, 브리핑 과정에서 기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질문했던 것, 브리핑한 공무원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들이 기사의 핵심이 됩니다.
정부 부처를 담당하는 기자들도 기자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취재를 하기도 합니다. 특히 확정되기 전의 정책 초안이나 정책 이면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는 ‘빨대’가 필요합니다. 빨대는 공개되지 않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취재원을 가리키는 언론계 속어인데, 기자 개인의 역량에 따라 많을 수도,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얘기가 좀 빗나갔습니다만, 중앙일보가 왜 복지부 출입 기자가 아닌 입사 5년차의 경찰 기자를 시켜 대통령의 언급을 반박하게 했는지 좀 이해가 되셨는지요?
국민은 경찰 담당 기자와 정부 부처 담당 기자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의 “죽치고 앉아 담합” 발언을 ‘조지기’(이것도 언론계 속어입니다.)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뭘까요? 중앙일보가 고민 끝에 매일 매일 현장을 뛸 수밖에 없는 경찰 담당 기자의 칼럼을 선택했다고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4.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저는 개인적으로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 도입 이후 논의해야 할 가장 핵심적이고 논쟁적인 문제-정부가 보완해야 할 문제-는 다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정부의 정보 공개 시스템’을 공무원들에게는 불리하고, 국민에게(‘언론에게’가 아니라)는 유리하게 개선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협상안을 한겨레에 넘겨준 누군가를 옹호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정보 공개 시스템 개선 문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네요.
그밖에 김승연 회장의 폭행 사건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들어 기자의 경찰서(또는 검찰청) 접근 제한을 비판한 데 대해서는 논의가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경찰서에 대한 접근 제한’의 세부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격언에 동의한다면, 이 사건들은 기자의 경찰서 접근 제한과는 무관하게,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반드시 밝혀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실이 없어지면 유괴 수사의 엠바고가 깨진다.’는 주장? 핑계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떤 기자가 경찰이 공개수사로 전환하기 전에 유괴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겠습니까?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래도 만약 보도하는 기자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서 사전에 처벌할 법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유괴 사건 엠바고를 기자실의 존폐와 연결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수십 년을 묻혔던 ‘수지 킴 살해사건’이 일어났던 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고, 정보의 흐름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 21세기입니다. 공기업 감사들이 ‘관행적으로’ 가던 외유 때문에 사직하는 시대입니다.
ⓒ 전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