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국민의 상식을 결정한다...서프라이즈 펌...
"정치는 국민의 상식을 결정한다."
연구소를 함께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스태프들에게 늘 한 말이 "정치는 국민의 상식을 결정한다"는 이야기였다. 원칙과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정치의 또 다른 중요성이란 점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정치가 사람들의 상식과 가치를 결정한다면, 가치와 상식을 보여주는 정치의 도덕적 책무는 훨씬 중요해진다.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은, 설령 민주화운동의 훈장을 달고 있더라도, 이런 도덕적 책무를 보여주지 못한 채 금세 정치판의 양아치가 되어버린다. 이런 진흙탕에서 "이기는 게 장땡이다. 꿩 잡는 게 매다"는 그릇된 역사를 끝내자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고집이었다. 이런 생각이 젊은 우리 스태프들을 열광시켰다.
실질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 스태프들이 실리(實利)와 대의(大義)가 부딪쳤을 때 늘 후자를 택하려고 노력해온 정서적 베이스는 이런 고집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거, 1997년 '3김 청산'을 위해 여당인 이회창 진영으로 가지 않은 것, 1998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종로 지역구를 떠나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의 구태를 깨기 위해 낙선을 무릅쓰고 부산에 출마했던 것, 지난 대선 때 정몽준 후보와 마지막까지 각서를 주고받지 않은 것 등이 모두 대의를 위한 선택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한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특히 내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동을 받았던 일이 1993년에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은퇴한 민주당은 이종찬(李種贊) 의원을 영입하려고 했다. 10여 년간 여당의 실세였던 거물이 야당으로 들어오겠다는데 세(勢) 불리기란 관점에서는 모셔 와도 크게 모셔 와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한사코 반대했다. 그분의 논지는 일관됐다. "그분이 우리당을 도와줘서 함께하겠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분을 야당으로 모셔오는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이 우리의 얼굴이 되는 것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입당은 환영하지만 야당의 간판이 된다면 야당으로서의 정통성이란 '가치'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반대로 당 최고위원회가 세 번이나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로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당을 주도하던 동교동계로부터 많은 미움을 샀다. 눈앞의 뻔한 불이익을 알면서도 대의를 따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집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음속 깊이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996년 노무현 대통령은 총선에 낙선하자 정계를 떠났다. "3김 청산하자고 했다가 졌으니 당분간은 할 일이 없다. 현실적으로 국민들은 3김씨가 주도하는 지역주의 정치를 선택했고, 거기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은 국민에게 다가갈 명분이 없으니 쉬어야 된다"면서 대책 없이 물러난 것이다. 참모들이 만류하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거시적 판단에 입각해 정치판을 떠나는 것이 참 멋있어 보였다.
국민들이 지신들의 주장을 받아 주지 않았으니, 자기가 정치를 계속하려면 3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면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되는 식으로 역사적 도랑을 건너뛰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도 간단 명쾌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1997년 10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 지지를 보낸 것은 반 3김이란 상식과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몸담았던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는 국민회의 창당으로 인한 야권분열 및 지역주의 반대의 기치를 내걸었던 모임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소속 멤버들은 서로의 입장차로 갈라지게 된다.
이인제가 됐건 이회창이 됐건 그들을 도와 '3김 청산'의 깃발을 내걸어야 한다는 이부영, 제정구 등과, 그래도 야당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권교체에 무게를 둬야 한다며 김대중을 지지한 김원기, 노무현 그룹으로 나뉜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3김 정치를 청산하자고 했다가, 도리어 3김씨에게 타깃이 돼서 떨어졌고, 3김이 주도한 지역주의를 반대했는데 말이다. 사실 '통추' 멤버들은 한결같이 3김의 횡포에 치를 떨었고. 모두 3김 정치구도를 깨는 것이 역사적 대의라고 굳게 믿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부영, 제정구 등은 3김 정치를 깰 수 있다면 이회창도 상관없다며 여당인 한나라당으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구원(舊怨)을 접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역사적 전통과 대의명분으로 보면 야당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김대중이다. 은퇴를 선언하고 무대를 떠난 가수였지만 음반을 다시 내고 컴백할 수 있다. 그런 걸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과 가치를 달리하는 정치세력이 선택한 사람이 단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세대교체를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역사적 명분과 가치가 전도된 것이다."
결국, 국민은 이회창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했다. 그때 여당행을 택한 의원들은 현실적 분노 때문에 역사적 도랑을 건너뛴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헷갈렸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상식'은 늘 고집스러웠다. 2001년 10월 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전패하자 당 쇄신 목소리가 커지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 실세인 권노갑 고문 퇴진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때 동교동계에 비판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권노갑 고문 퇴진을 요구하는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 많은 정치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동교동계에 '환심'을 사서 어떻게든 대선 후보로 낙점받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판단은 이러했다. 당 쇄신을 명분으로 권노갑 고문을 공격하는 것은 첫째, 김대중 정부를 흔들기 위한 게임으로 가게 돼 있으며, 둘째, 실제적 진실이란 면에서 권노갑 고문에게는 계속되는 보궐선거 패배의 실제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변호사다운 판단이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어온 개혁전선 자체를 무너뜨리는 데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로 노무현 대통령은 그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시(斜視) 눈을 뜨고 보자면 이 모든 선택이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 참모들의 고차원적 노림수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함께 지내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성품이 체질적으로 원래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보면, 나를 포함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해 온 우리 스태프는 그분에게서 정치공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와 이를 지키는 상식이 무엇인지 배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우리 참모들이 제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노무현이라는 끈이 없었다면 모두가 정치판의 정치꾼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포용력을 키우라고 말할 때, 항상 '원칙'과 '대의'를 입에 달고 다녔던 아름다운 정치인을 만나 역사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게 됐다. 그런 점에서 그를 모셨던 우리 모두는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다.
생존의 논리만이 횡행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무엇이 대의이고 원칙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가치 혼돈의 난세일수록 무엇이 대의인지 판단하고, 그에 맞도록 단순명쾌하게 자기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노무현식 정치노선의 진면목(眞面目)일 것이다.
---안희정의 '담금질'에서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