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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서프라이즈 펌...흐름... 2006. 5. 30. 13:25
젊고 ‘제대로’ 된 네티즌에 告함 - II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오늘’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까운 과거일수록 공부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는 현대사를 기피한 보수 역사학계와 정통성 없는 수구세력의 입맛이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저술한 ‘한국현대사 산책 70년대’ 뒤표지에 실린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의 지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줄 모르는 민족이 미래를 운운하는 꼴은 다른 민족의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는 선배들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를 느껴보기를 당부하며 그것이 선배들, 아니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겠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국민의 가슴에 ‘울컥함’을 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4·19와 5·18이 꼽힌다. 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를 기록한 4·19가 ‘미완의 혁명’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까. 공식적으로 193명이 죽고 3193명을 다쳤으며 70여명의 행방불명자를 기록한 5·18의 가해자는 왜 여전히 ‘국가원로’로 대접받을까.
굳이 세계사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한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자체정화기능이 필요하다. 스스로 깨끗하고자 하지 않은 조직은 이내 부패하기 마련이며 우리민족도 그런 사례들을 수없이 겪어왔다. 사람에 따라 시각차는 있지만 대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이 글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폄하고자 작성된 글은 ‘절대’ 아니다. ‘다소’ 감성적인 요즈음의 젊은 네티즌들이 ‘제대로’ 된 역사관과 이성적 판단력을 갖추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 하지만 사실을 전달하고, 이 과정에 포함된 사견이 특정인과 특정집단을 폄훼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결국 그게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학생들의 희생, 4·19의 소산
‘제대로’ 된 친일청산도 못한 주제에 우리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노렸다. 자유당의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직전이었다. 1956년 5·15선거를 앞두고 승리가 유력했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는 급사했다. 60년 선거에서도 유권자위협, 투표함 바꿔치기 등으로 이승만·이기붕 후보는 80%가 넘는 ‘아무도 믿지 않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결국 자유당의 부패를 참다못한 ‘제대로’ 된 학생들은 일련의 반부정·반정부항쟁을 펼치게 된다. 4·19 혁명이다. 요즘의 교육체계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시위에는 ‘제대로’ 된 중·고교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행방불명됐다가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발견된 마산상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전 국민을 분노로 끓어오르게 했다.
지금은 강한 보수성향을 보이지만 사실 4·19혁명의 도화선은 1960년 2월 28일의 대구였다.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를 강요한 정부의 방침에 경북고와 대구고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 것. 이어 3월 1일 서울·대전·수원, 8일 대전, 12일과 13일 부산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제1차 마산봉기, 제2차 마산봉기, 고대생 피습사건은 4월 19일 경무대 발포로 이어졌고 결국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보다 못한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25일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를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경비를 뚫고 평화시위를 감행했고 이승만은 하야 후 망명했다. 이기붕 가족은 자살했다.
4·19는 학생의 힘(Student Power)이었다. 우리의 ‘젊은’ 학생들은 일제시절이던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사건 등을 통해 이미 강한 저항의식과 애국심을 표출한바 있다. 이들의 희생이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구축했다. 살아남아 그 희생의 소산을 향유하는 우리는 이 ‘제대로’ 된 선배들에 희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민주주의의 후퇴’ 5·16쿠데타로 32년간 군사정권 시작
하지만 ‘학생의 힘’으로 바로잡힐 듯 보였던 한국사는 ‘탁월한 영도자’에 의해 다시 후퇴하고 만다. 이듬해 5월 16일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했다. 독재청산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기대한 국민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고, 사망자 183명과 부상자 6259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 박정희는 ‘혁명(革命)’을 ‘의거(義擧)’로 격하시켰다.
5·16의 배경에 당시 우리사회의 혼란도 한몫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의원내각제의 새 헌법이 등장했고, 형식적 국가원수였던 윤보선 대통령과 실세 국무총리였던 장면 내각이 출범했으나 신구파의 대립으로 국가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윤보선의 하야 후 6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이후 우리나라에 32년간의 군사독재를 ‘선물’했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도 이승만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한다. 장기집권이었다. 69년 3선개헌을 통과시킨 그는 72년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다시 계엄령을 선포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이른바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이름도 좋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얼핏 들으면 무슨 평화통일·민주화운동으로 착각할만한 하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으로 농어촌 근대화와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해결에 기여했다. 이게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주장하는 박정희의 공(功)이다. 장면내각이 준비한 경제개발계획이었지만 박정희의 공도 인정할만하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고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노골화되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정권유지를 시도한다.
다시 정치인과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이 일어났고, 1974년 8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했다. 이어 1979년 YH사건, 김영삼 의원직 박탈 등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크게 고조돼 10월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이 터졌고, 결국 26일 박정희는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급서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친일청산실패의 산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돼 장교로 활동해온 박정희의 일본이름은 알려졌듯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 하지만 창씨개명은 계속된다. 자신의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 그는 작명실력을 발휘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순수 일본이름을 만들어낸다. 정말 ‘똑소리’ 나는 영특한 인물이었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은 밝혀진 것만도 상당히 된다. 문경보통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노땅’이었다. 하지만 하찮은 나이 정도가 그의 애국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열혈청년 박정희는 호적상 입학조건이 안 되자 아예 호적을 고친다. 보기 드문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국가는 조선을 짓밟은 대일본제국이었다.
그래도 입학이 쉽지 않자 박정희는 동료교사 유증선의 아이디어를 따라 “盡忠報國滅私奉公(진충보국멸사봉공)”이라는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유일(唯一)’한 조선사람이 된 뒤 당당히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며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는 눈물겨운 선서를 낭독한다.
군관학교 졸업 후엔 항일세력 토벌에 110여회에 참가한다.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 유격대 등 그의 토벌대상 항일세력은 ‘독립군’이었다. 다카키 마사오는 1년 만에 중위로 승진할 정도로 진급이 빨랐을 정도로 ‘유능한’ 일본군인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몰락하자 피난민을 가장, 북경에서 광복군에 합류해 이내 ‘유능한’ 좌익계열의 장교가 된다.
게다가 박정희는 1949년 여수·순천사건 관련 공산주의혐의자로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끝내 전향하지 않은 좌파, 즉 ‘미전향 빨갱이’였다. 그가 평생 색깔론을 들먹이며 반공의식을 강조했던 데는 범상치 않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근본적인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맞고 자란 아이가 커서 자녀를 두들겨 패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박정희의 등장은 그 자체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우리민족의 아픔이었다. 광복 후 당연히 청산됐어야할 친일파가 국군창설에 참여한 뒤 승승장구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 등과 비교할 때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이 과정엔 ‘친일’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다음 편에 계속)
© 希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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