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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마다 5월이면 80년 5월18일 밤이 생각난다...서프라이즈 펌...
    흐름... 2006. 5. 16. 13:37
    1980년의 필자의 상황


    78년 재수를 통해 대학에 입학한 나는 학비를 보태기 위해 고등학생 과외지도를 하는 잉여의 여가 시간은 을지로에 있는 야학에서 시골서 학업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어린 소년, 소녀들에게 꿈을 찾아 주자는 어느 선배와 함께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의 지원을 얻어 야학을 열었고, 내가 맡은 일은 사회과목 지도와 학생 주임이었다.


    생활과 주거가 불안정하였던 아이들은 1-2달 지나면서 결석하는 아이들이 많아져 물어물어 찾아가 보면, 밥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던 아이들도 있었다. 주인이 월급도 안 주고 내쫓은 것이고 그 아이들은 나에게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나는 용돈을 털어 애들 저녁을 사주고 못 받은 월급을 받아주려 노력하였다. 일부 찾아가 사정도 해보고 하였지만 사람들이 너무너무 악랄했다. 박정희 시절의 노동자들의 여건은 이렇듯 열악하였다.


    법대에 다니는 선배들이 소장을 써주어 간이소송도 해보았지만 고용계약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여의치 않아,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 시절의 노동자는 그렇듯 사회적 보호가 전무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중부서 감시 대상인물이 되어 있다. 어느 업주와 심하게 다툰 후, 중부서로 연행되었다. 경찰 고위직에 있던 친구 아버님의 도움으로 다행히 국보법위반 혐의는 벗었지만, 강제 입대대상이 되어 집에 가보지도 못한 채, 전방 사단 신병 훈련소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고 수색대에 차출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박정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말하기도 쪽팔린 모습으로 비명횡사했다. 그리고 희망의 80년 서울의 봄, 나는 근 15일 만에 볼 수 있는 신문지면에서 불안한 희망을 보았다.


    그런데 5월 어느 날 그날은 비가 몹시 내리던 날이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데프콘 2…, 그러나 항상 비상의 상태로 지내던 전방 GP에서 비상이 불편할 것이 없었지만, 전방의 북한군진지에서 밤새 야포와 전차가 기동하고, 북한군도 진지 투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쟁 전야 같은 분위기였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내무반 여기저기에서 동료들은 집에 편지를 쓰며, 머리털을 자르고 손톱을 잘라 동봉하고 있었다. 그 곳은 최전방 GP였다. 전쟁이 난다면 모두 살기를 바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날 저녁 휘영청 밝은 달 아래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내가 생명을 바쳐 지켜야 할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객관적 가치를 되새겨 보았다. 


    죄 없고 불쌍한 어린 소년들의 순수한 노력의 대가마저 강탈당해도 침묵해야 하고, 그들을 돕는 손길마저 불온한 움직임으로 관찰해야 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옹졸하고 치사한 개미심장보다 작은 심장을 가진 대통령과 그의 똘마니들이 움직이는 불쌍한 나라…, 대한민국…. 그날 밤 나는 너무 비참했다.


    저 가증스런 박정희 유신체제를 지나,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 집단이 좌지우지하는 부끄러운 조국…. 내가 죽을 시간이 되면 무슨 가치를 갖고 보람되게 죽을 수 있을까? 당시의 대한민국에는 붙잡을 만한 가치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우리 엄마와 가족을 위해 죽는다는 마음만 들뿐….


    그 다음날 대낮에 인민군 민경부대 정치장교가 군사 분계선근처까지 우정,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나와서 우리에게 소리쳤다. “국군이 광주로 진입하여 양민을 쏴 죽였다. 즉시 광주로 가서 양민들을 구하여야 하지 않겠나?”


    우린 다른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짓말 치지 마라. 개새끼들아. 국군이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1달반 뒤 휴가차 서울에 온 나는 인민군 장교의 말이 맞는 말이었음을 친구들의 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해에는 우리 사단에는 유난히 월북자가 많이 발생하였고, 심지어 사단 공병장교까지 월북하여 그때마다 우리 수색대는 비무장 지대에 매복 투입되어 길게는 일주일씩 장기 매복 근무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해마다 5월이 되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그날 밤을 회상하곤 한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허무한 심정을 기억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나의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이다.


    단, 박정희같이 가증스런 자가 국민의 영웅이라고 우겨대는 일부 국민이나, 남의 것을 강탈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더러운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되겠다고 나서는 뻔뻔스런 모습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나라를 빨리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나의 조카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한국사람들은 왜 그냥 살도록 놔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종종 말한다.


    맺는 말


    그러나 2006년 5월 평택에서 비무장에 무저항인 군인들을 죽창으로 때리고 나래차기로 패고도 단지 같은 5월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자신들이 제2의 광주라고 억지를 부리는 한총련과 범대위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80년 광주에서 학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광폭한 신군부의 피해자였고 그들의 주장은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실시하라는 것이었으며, 시민들의 주장은 학생들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의 목숨을 전두환이 같은 살인마로부터 지킬 자유가 있는 것이다. 2006년 평택에서 당신들 중 누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실제로 누가 죽었는가?


    이 물음에 답할 자신이 없다면, 당신들의 폭력적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더 이상 민주화의 성지 광주를 욕되게 하는 당신들의 행동과 동일시 하는 뻔뻔함을 당신들의 대표 중 누군가 이에 대해 국민들에게 떳떳이 사과하고 응분의 법적 책임을 져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싹이 틔워지나 정당한 국법에 순응함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법위에 군림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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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들이였다...

     

    5월 14일 밤 MBC에서 방송된 '내 친구 김동관'...

    차마 눈물짓기도 죄스러웠다...
     
    잊혀져서는 안되는데...
    그냥 그대로 잊혀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쁜 새끼...전두환...
    그 새끼랑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니...우린 모두 죄인이다...
     

    오른쪽 머리 희끗하신 분이 김동관씨...가운데는 어머니 김영순여사님, 친구 전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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